기사환국 배경 및 남인 집권 과정 요약 정리 1689년(숙종 15년)에 일어난 기사환국은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기사환국은 소의 장씨(장희빈) 소생인 왕자 윤을 숙종이 원자로 책봉하려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원자 책봉을 반대하던 서인들 대부분이 벼슬을 빼앗기고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숙종의 왕비인 인현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던 중 소의 장씨(장희빈)가 아들을 낳자, 숙종 은 크게 기뻐하면서 소의 장씨의 소생인 왕자 윤을 원자로 삼으려 했고, 이에 송시열 등의 서인들은 중전이 아직 젊었으니 원자 책봉을 뒤로 미루라고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숙종은 1689년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고 그의 소생인 왕자.. 한국역사 2016. 10. 15. 남이장군 시 남이장군이 역적으로 몰린 이유는 남이장군 시인데, 남이장군을 시기했던 유자광이 시의 내용을 문제삼아 모함했기 때문입니다. 남이장군의 시는 그가 두만강 물줄기를 보고 감동하여 읊은 시조였는데, 이를 유자광이 교묘하게 트집잡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남이장군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하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 이 시에서 유자광은 '사나이 스무 살 에 나라 평정 못하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를 교묘하게 트집잡아 역모를 품었 다고 모함한 것입니다. 남이장군은 이 시 말고도 혜성이 나타나자 옛 것이 사라지고 새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했는데, 유자광은 이 말 역시 역모를 품은 말이라고 예종에.. 한국역사 2016. 9. 1. 황희정승 이야기 조선시대 청렴한 명재상으로 유명한 황희정승 이야기는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황희정승 (1363~1452)은 개경에서 판강릉 부사인 황군서의 아들로 태어나 이미 14세(고려 우왕 2년)때 조상의 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에 오르는 음보로 복안궁 녹사가 되었습니다. 황희정승은 16세 때 과거를 봐서 초시.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27세 때 문과에 합격하여 비로소 정식으로 벼슬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고려 왕조가 망하자 두 왕조를 섬기지 않으려고 두문동으로 들어갔으나,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유로 다시 조정에 나가서 정치를 하였습니다. 그가 조정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것은 태종 5년(1405)이었습니다. 그는 민무구 형제의 외척세력을 보다못해 엄중한 단속을 상소하였고, 태종은 민무구 형제를 귀양보.. 한국역사 2016. 8. 29. 대동법이란 광해군 재위시 실시한 조세 제도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 재위시 실시한 대동법이란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한 제도로 광해군 대동법은 조선 최고의 개혁이라고 평가됩니다. 대동법은 광해군 1년(1608년)에 실시되었으며 대동법의 목적은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부족한 국가재원 확충 방안으로 토지결수에 따라 공물을 쌀로 징수하게 한 제도입니다. 대동법이 실시된 후 숙종 때 이르러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대동법을 시행하였습니다. 공물 대신 쌀을 조세로 바치게 한 이 제도는 조선 최고의 개혁입니다. '공물'이란 백성이 궁중이나 나라에 바치던 세금으로 주로 특산물이나 토산물 등을 세금 으로 바쳤다고 합니다. '토지결수'란 수확량을 기준으로 토지를 측량하는 결부제로 토지 절대면적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곡식 수확량과 토지면적, 조세수취를.. 한국역사 2016. 7. 22. 병인양요 신미양요 고종 재위시 프랑스 및 미국 군함이 침입한 사건이 각각 병인양요 신미양요입니다.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를 칩입한 사건이며, 신미양요는 평양 군민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공격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미국 군함이 강화도를 침입한 사건입니다. 천주교 신자에 대한 병인박해(천주교 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었으며, 이 보고를 받은 프랑스는 보복을 위해 1866년 10월 군함 7척에 1,000명의 군사를 태우고 조선으로 건너와서 강화도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박해는 핑계였을 뿐 조선을 협박하여 강제로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조선군이 강화도를 되찾기 위해 공격을 했으나 프랑스의 대포에 밀려났습니다. 그렇지만 제주 목사 양헌수.. 한국역사 2016. 2. 11.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 원인 1895년 음력 8월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을미사변'이라고 하는데, 을미사변 원인은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차단하고 조선의 내정을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위함이었으며,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은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싸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럼 명성황후는 어떤 인물인지, 을미사변 과정은 어떠했는지, 이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명성황후(1851~1895)의 이름은 민자영으로 본관은 여흥이며 인현왕후 아버지인 민유증의 후손입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인현왕후의 사가였던 감고당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로 인한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열악한 민자영의 집안환경이 외척의 세도 정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한국역사 2016. 2. 1. 조선시대 무오사화 어떤 사건일까 연산군 4년 1498년 무오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는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영남 학자)를 모함하여 사관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파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으로, 사화란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는 의미이며, 무오년에 일어났다고 '무오사화'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무오사화 원인은 사초에 기록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 때문입니다. 조의제문은 원래 의제(중국의 초나라 회왕)를 조상하는 글인데, 항우에게 갑자기 죽임을 당한 왕입니다. 항우는 의제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된 인물입니다. 김종직은 수양 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행위를 중국 고사에 비유하는 글을 적은 것입니다.. 여기에 사관 김일손의 의견도 덧붙여져 있었는데, '김종직이 충성스러운 의분으로 조의제문을 지었다'고 하였.. 한국역사 2016. 1. 18. 이전 1 2 3 4 5 ···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