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병인양요 신미양요

고두암 2016. 2. 11.

고종 재위시 프랑스 및 미국 군함이 침입한 사건이 각각 병인양요 신미양요입니다.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를 칩입한 사건이며, 신미양요는 평양 군민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공격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미국 군함이 강화도를 침입한 사건입니다.

 

<병인양호>

천주교 신자에 대한 병인박해(천주교 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었으며, 이 보고를 받은 프랑스는 보복을

위해 1866년 10월 군함 7척에 1,000명의 군사를 태우고 조선으로 건너와서 강화도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박해는 핑계였을 뿐 조선을 협박하여 강제로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조선군이 강화도를 되찾기 위해 공격을 했으나 프랑스의 대포에 밀려났습니다. 그렇지만 제주 목사 양헌수가

정족 산성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 군을 물리쳤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입니다. 비록 큰 규모

전투는 아니지만 프랑스 군은 수치를 당하고 국제 정세에 눈이 어두운 흥선대원군의 자만심만 키웠습니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은 서양과 담을 쌓는 척화 비문을 남기게 되었으며, 프랑스 군은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

되어 있던 297권의 도서와 금은괴 등을 약탈하였습니다. 외규장각은 1782년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

하기 위해 강화도에 설치한 것으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이었습니다.

 

부속 도서관 설치 후 총 1,000여 권의 왕실 관련 주요 서적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에게

297권의 서적을 빼앗기고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프랑스에 빼앗겼던 서적은 145년(2011년) 만에

환수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전시 중입니다.

 

 

<신미양요>

1866년 8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했다가 평양 군민의 공격으로

불타버린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 사건이 신미양요를 불러왔습니다.

 

1871년 6월,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군함 5척에 1,200여 명의 군사와 85문의

대포를 갖추고 강화도 해협으로 칩입했으며, 조선군은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손돌목 포격 사건'이

우리나라와 미국 간의 최초의 충돌이었습니다.

 

 

미군은 평화 협상이 깨지자 마침내 1871년 6월 10일 강화도 초지진으로 상륙하여 덕진진을 점령했고, 다음

날인 6월 11일에는 광성진을 연이어 점령했습니다. 이 때 광성진을 지키고 있던 어재연 등 조선군 243명이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100여 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으며, 20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비록 미국에 패했지만 조선군은 결사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조선 조정 역시 미국과 통상 교섭 자체를

거부하며 강경하게 버티자 미군은 할 수 없이 7월 3일 중국으로 철수하였습니다. 미군은 흥선대원군의 고집

스러운 쇄국 정책에 밀려 한 달 정도 버티다가 물러난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종로 네거리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는데, 그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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