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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멸망과 서태후

고두암 2015. 10. 8.

청나라 황제의 후궁이었던 서태후는 의혹 투성이의 여걸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 여걸 서태후의 생애와

함께 청나라 멸망까지의 역사를 되돌아 보겠습니다. 한낱 후궁에서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성지배자

였던 서태후(1835~1908, 자희황태후)는 일생 중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청나라 황제인 함풍제가 1861년에 죽었는데, 황후(동태후)에게 아들이 없어서 후궁의 아들로 대를 이을

형편이 되었습니다. 서태후는 가장 지위가 낮은 후궁이었는데, 그녀에게만 아들이 있었기에 서태후의

6살된 아들 재순이 동치제가 되어 황제에 올랐습니다.

 

 

동치제의 나이가 어려 정치는 8명이 섭정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신하다가 서태후와 동태후(함풍제의 정실

황후)가 계략을 꾸며 정치를 넘겨 받았고, 여기에 전 황제의 동생인 공친왕이 힘을 보태 세 사람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3인방은 개혁정치를 실시하여 여러 업적을 이루었는데, 태평천국의 난과 염군의 난을 가라앉혔으며,

서양식 군수 공장을 세우는 한편, 근대적인 세관과 외국어 학교를 설립하고 정부의 부패를 막기 위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야심 많은 서태후는 능력도 뛰어나, 동치제가 다 자라서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는 때가 되었어도 그녀는

계속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1875년 1월, 슬하에 아들이 없던 동치제가 갑자기 스무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임신 중이던 동치제

의 황후도 황제의 죽음을 보고 자결하고 말았는데, 이들의 죽음을 두고 여러가지 나쁜 소문이 아래와

같이 나돌았습니다.

 

"서태후가 독살했어! 젊은 황제가 왜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죽어? 또 임신까지 한 황후가 왜 목숨을 끊어?"

 

자신의 아들인 황제가 죽자 서태후는 궁정 회의를 열어서 세살짜리 조카를 양자로 삼아 황제의 자리에

앉혔는데, 그가 곧 광서제였으며, 이름만 황제였을 뿐 모든 정치는 서태후와 동태후가 맡았습니다.

 

6년이 지나 동태후가 또 갑자기 죽었는데, 이 때에도 서태후가 죽였을거라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년 뒤에는 공친왕마저 쫒아 내고 서태후 혼자 모든 권력을 쥐었습니다.

 

 

1887년, 세살짜리였던 광서제가 성장하여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발표했는데, 대신들 사이에서 서태후를

지지하는 태후당(수구파)과 황제를 지지하는 황제당(혁신파)이 생겨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고, 그 결과

'무술정변'이 발생하였습니다.

 

청일 전쟁에서 패배를 당한 지 3년이 지난 1898년, 광서제는 중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개혁을 서둘렀고

수구파는 맹렬히 반대하였습니다. 혁신파는 군대의 우두머리인 위안 스카이를 끌어들여 수구파를 꺽고

서태후를 내몰아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비밀 지시를 받은 '위안 스카이'가 갑자기 서태후 쪽으로 돌아서면서 자신을 쫓아 내려는

광서제의 음모를 알게 된 서태후는 노발대발하며 혁신파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잡아들여 사형에 처

했습니다. 이로 인해 개혁 정책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 뒤부터 황제는 있으나마나 한 형식적인 존재가 되었고 모든 정치는 서태후의 손에서 이루어졌지요.

결국 중국의 근대화는 황소걸음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황제 나라가 무너져 가고 있던 것이지요.

 

서태후는 외국 세력에 반대하는 의화단 운동을 도왔고, 1900년에는 의화단 운동이 최고로 드높아지며

외국인 수백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외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장악하자 피신한 서태후도 이 때만은 어쩌지 못하고 치욕스러운 강화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1902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몇년 못가서 병이 들었는데, 광서제 또한

이미 병이 들어 누워 있었습니다.

 

 

서태후는 누운 채로 세살인 푸이를 황태자로 지명했고, 1908년 광서제와 서태후가 죽자, 푸이는 청나라

최후의 황제가 되었으며, 푸이는 뒷날 만주국(일본의 허수아비 정권)의 황제가 되기도 합니다.

 

광서제가 갑자기 죽은 의혹 또한 풀리지 않고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데, 죽기 전날까지도 광서제는

건강한 편이었으나 약 한첩을 먹은 뒤부터 상태가 나빠졌다고 합니다. 역사가들은 서태후가 광서제를

죽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역시 그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그 뒤 3년이 지난 1912년 2월, 아시아의 대제국 청나라는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위안 스카이가 중화

민국 초대 대총통이 됨으로써 중국은 답답한 황제 나라에서 벗어나 근대화의 바람을 맞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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