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글

마젤란의 세계 일주 대항해에 대해 알아볼까요

고두암 2015. 10. 20.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포르투갈 출신 마젤란의 세계 일주는 1519년 9월 20일 시작되었습니다. 세계 일주를

위한 마젤란의 대항해는 4척의 함대와 200명이 넘는 선원을 태우고 서쪽으로 항해하여 남미 대륙의 동쪽 해안

으로 항해하였습니다.

 

 

마젤란(1480~1521)이 세계 일주를 위해 대항해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1510년대 말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확장에 힘을 쏟았기 때문인데, 두 나라는 대서양에 접해 있어서 항해가 유리하였고,

바로 향료의 매력에도 끌렸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향료는 아시아에서는 헐값이지만 유럽으로 가져오면 매우

비싼 값으로 팔 수 있었습니다.

 

포루투갈 출신 마젤란은 해군에 입대하여 여러번 전쟁에 참가했으나 국왕과 뜻이 맞지 않아 에스파냐로 가서

카를로스 1세를 섬겼습니다. "바스코 다 가마는 동쪽으로 항해했으나 저는 반대로 서쪽으로 가서 향료 섬(몰

루카 군도)을 찾아 내겠습니다." 라고 마젤란이 계획을 말하자 왕은 허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518년 3월 22일 마젤란은 원정대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몰루카 군도로 가는 항로를 찾도록 지시

받게 되면서 1519년 9월 20일 드디어 항구를 출발하여 남미 대륙의 동쪽 해안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한 때 폭풍에 발이 묶였던 마젤란 함대는 11월 29일에 세인트 아우구스티네 곶 남서쪽에 닿았습니다. 그들은

카보프리오를 돌아 12월 13일에는 리우데자네이루 만에 도달했으며, 항해를 계속한 끝에 1520년 3월 31일

세인트줄리안 항구에 도착해서 부활절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에스파냐 출신 선장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마젤란은 반란을 가라앉힌 뒤, 선장 한 명을 사형시키고

다시 남쪽으로 항해했습니다. 10월 21일에는 버진스 곶을 돌아 새로운 해협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이 곳은

그가 새로이 찾아 낸 해협이라는 것이 밝혀져 '마젤란 해협'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11월 28일 3척의 배만 망망 대해에 접어들었는데, 그 곳은 태평양이었습니다. 마젤란은 괴혈병과 굶주림을

이겨 내고 온갖 고생 끝에 페루 해협을 통과했고, 태평양 횡단에도 성공하여 드디어 12월 18일에는 칠레 해안

을 눈앞에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북서쪽으로 항해하여 1521년 1월 24일 투아모투 군도의 푸카푸카라는 육지를 발견했으며, 3월

6일에는 괌 섬에 최초로 상륙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괌 섬은 마리아나 제도에 딸려 있는 곳입니다.

 

마젤란은 괌 섬에서 신선한 음식으로 충분히 쉰 다음에 3월 9일 다시 항해를 시작했고, 그들은 필리핀 제도를

목표로 하였으나 도달한 곳은 세부 섬의 세부 항이었습니다. 세부 항은 동남 아시아 상인들이 드나드는 무역

항으로 필리핀의 세부 섬에 있었습니다.

 

 

'필리핀'의 기원은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 '펠리페나'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습니다.

1521년 4월 7일 마젤란 함대가 세부항에 대포를 쏘아대자 세부 왕이 작은 배를 타고 직접 찾아와서 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향료의 산지인 몰루카 군도를 찾기 위해 왔다는 마젤란의 말을 듣고 세부 섬의 왕은 항구에 정박한 배의 세금

부터 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젤란 쪽에서는 이것을 거절하고, 도리어 십자가를 세우며 크리스트 교를

믿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인근 막탄 섬의 라프라프 왕이 이것을 거절하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마젤란은 무장병 60명을 이끌고 막탄 섬으로 쳐들어갔다가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1522년 9월 6일 마젤란 일행은 세부 섬을 탈출하여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남은 함대는 빅토리아호 한 척 뿐

이었고, 승무원 10여명만이 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여행은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를 달성했다는 데 그 의미가 컸으며, 이 항해로 '지구는 둥굴다'

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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