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영조의 탕평책

고두암 2015. 12. 19.

노론과 소론의 싸움을 막으려는 영조의 탕평책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당파 간, 즉 노론과 소론의 싸움을 막고 세력 균형을 추진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는데, 이 때

추진한 정책이 바로 '탕평책'입니다.

 

탕평이란 말은 오경의 하나인 <서경> 가운데 '왕도탕탕 왕도평평(王道蕩蕩 王道平平)이라는 문구

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영조는 1728년 소론인 이인좌가 일으킨 반란을 겪었으며, 1762년에

는 노론의 압력에 의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영조는 승하할 때까지 탕평책(蕩平策)을 통치의 이념으로 삼았으며, 이는 정조에 의해 계승됩니다.

숙종의 둘째 아들이며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가 낳은 금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조선의 제21대

임금인 영조입니다.

 

그는 1699년 연잉군에 봉해지고, 1717년에는 대리 청청을 하였으며, 1721년(경종 1)에 왕세제로

책봉되었습니다. 31세에 즉위한 영조는 노론 대신을 등용했으나 탕평책을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신하들에게 탕평책의 교지를 내렸습니다.

 

 

"성현께서 임금과 신하는 아버지와 아들 같다 하시었소. 여러 아들이 서로 싸우면 아버지가 어느

편을 들겠소? 과인은 '왕도탕탕'으로 모든 대신들을 대할 것이니, 모름지기 경들은 화목하여 충성

을 다해 주기 바라오." 그렇지만 당파 싸움은 쉽게 가라앉지 안았습니다.

 

영조의 탕평책 실시와 그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선조 이후로 시작된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 등으로 일컫는 '붕당

정치'는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으며, 심지어 왕권마저 약화시키기에 이르

렀습니다.

 

 

이런 당파 싸움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보냈던 사신들의 엇갈린 번응을 예로 보아도 나라를 위해

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소속된 정파의 이익과 권력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세제 시절부터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을 위협받았던 영조가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영조는 임금이 되자마자 교서를 내려 탕평의 의지를 나타내며 당쟁을 없애고 당파 간의 균형을 꾀

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축옥사와 임인옥사를 일으켜 나라를 시끄럽게

한 소론의 주동자들을 모두 숙청하고 노론 세력을 다시 조정에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또다시 노론과 소론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소론을 공격하는 노론 강경파를 몰아

내고, 소론과 노론의 온건한 신하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책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또 노론과 소론에게 공평하게 관직을 내려 어느 한쪽으로 권력이 치우치는 것을 막고, 양당 간의

선의의 경쟁과 견제를 유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균관 안에 탕평비를 세워 유생들 역시 서로가

속한 당파와 주장에 따라 논쟁을 벌이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러한 영조의 노력은 결실을 맺는 듯하였으나, 1762년 노론과 소론, 남인의 연합 세력 사이에

청난 정치적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굶어 죽는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양조의 탕평책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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