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조선시대 무오사화 어떤 사건일까

고두암 2016. 1. 18.

연산군 4년 1498년 무오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는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영남 학자)를

모함하여 사관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파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으로, 사화란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는

의미이며, 무오년에 일어났다고 '무오사화'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무오사화 원인은 사초에 기록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 때문입니다. 조의제문은 원래 의제(중국의

초나라 회왕)를 조상하는 글인데, 항우에게 갑자기 죽임을 당한 왕입니다. 항우는 의제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된 인물입니다. 김종직은 수양 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행위를 중국 고사에 비유하는 

글을 적은 것입니다..

 

 

여기에 사관 김일손의 의견도 덧붙여져 있었는데, '김종직이 충성스러운 의분으로 조의제문을 지었다'고 하였

습니다. '조의제문'의 내용은 누가 읽어 보아도 단종을 몰아 내어 죽이고 왕이 된 세조를 비난하는 글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훈구파에 속해 있는 유자광과 이극돈, 윤필상 등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빌미로 사림파(영남 학자)를 모조리

몰아내기로 하고 도승지 신수근의 안내를 받아 밤에 연산군을 찾아가서 사관인 영남 학자들이 세조 대왕을

헐뜯었다고 일러 바치고, 사초를 본 연산군은 즉시 사관 김일손을 잡아 들이고 국청을 열었습니다. 

 

사초는 본래 임금도 보지 못하는 것인데, 이극돈, 유자광, 윤필상 등 훈구파는 이를 어기고 자신들의 반대파인

사림파(영남 학자)를 제거하기 위해 사초를 연산군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연산군이 김일손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네가 감히 실록 편찬을 계기로 세조 대왕을 능멸하였다 하니, 숨기지

말고 고하렸다! 할바마마(추존 덕종, 성종의 아버지)의 후궁이신 권씨도 헐뜯었다는데...."

 

"사관이라 함은 보고 들은 것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도록 되어 있사옵니다. 덕종 대왕마마 일은 허반에게 들은

바가 있어서...."

 

그러자 연산군은 허반을 잡아들이라 하였고, 한 차례의 심문 끝에 유자광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유자광은 김일손과 허반을 가두고 집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이튿날, 유자광은 김일손을 문초했는데,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김종서, 황보인 등을 폭력으로 죽인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음이 드러났으며, 김종직을 따

르던 선비들이 세조를 비난한 것도 밝혀졌습니다.

 

 

유자광은 김종직과 관련된 사람들도 체포하여 문초하고, 그 내용을 며칠 뒤에 연산군에게 보고했습니다.

"김종직은 초나라 의제를 애도하는 글에서 세조 대왕을 진시황에 비유하고, 노산군을 의제에 비교하여 무례

하게도 '조의제문'을 썼으며 그의 제자 김일손은 한 술 더 떠서 그것을 충성스러운 글이라 찬양하였사옵니다."

 

"어지러운 왕실과 나라를 바로잡으신 세조 대왕마마가 아니신가? 관련된 자들을 대역죄로 다스리라!"

이렇게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은 무덤이 파헤쳐지고 유골이 참형에 처해졌고, 그의 제자인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도 능지 처참되었으며, 이목, 허반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또 죄를 미리 알리지 않았다는 8명과 김종직의 제자 10명은 파벌을 지어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죄로 귀양을

보냈으며, 이극돈, 어세겸 등은 사관으로서 태만했다는 죄를 물어 벼슬을 빼았겼습니다. 이리하여 이 사건의

실마리를 만든 이극돈은 도리어 파면당했으며 유자광만이 김종직에게 품었던 원한을 갚은 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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