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정묘호란 원인(배경)과 결과 요약 정리

고두암 2015. 12. 17.

1627년 1월 13일(인조 5년)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정묘호란 원인(배경)은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의 

중립정책 대신 서인들이 노골적으로 명나라와는 친하고 후금은 오랑캐 집단이라고 무시하는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정묘호란(1627.1.13일 발생)은 만주에 본거지를 둔 후금의 침입으로 인한 조선과 후금 간의 전쟁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란을 떠났으며, 3월 3일 맺은 정묘조약으로 후금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는 치욕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정묘호란 결과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후금은 조선의 의주, 용천, 선천, 안주, 평양, 황주, 평산을 점령하고,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란을

갔으며,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란하였습니다.

 

후금은 2월 9일 조선 땅 황주에서 부장 유해를 강화도로 보내 '명나라 연호(천계)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요구했습니다.

 

 

이에 양측은 ① 화약 후 후금은 즉시 철병할 것, ② 후금철병 후 압록강을 재침입하지 않을 것, ③ 양

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④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3월

3일 정묘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또 조선 왕자 대신에 조선 왕실의 종친인 원창군을 인질로 후금에 보냈으며, 후금군도 철수하였습니다.

 

이제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 정묘호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펴던 광해군이 쫓겨나고 친명파인 인조가

하였고, 이괄의 난(1624년)을 함께 한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쳐 인조반정과 광해군

폐위된 사실을 알리며, 후금을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627년, 후금의 칸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등극하며 조선을 바라

보는 후금의 태도가 곱지않는 쪽으로 바뀌면서, 후금의 2대 칸 홍타이지는 명나라와 친하면서 자신의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결국 1627년 1월 13일, 홍타이지는 광해군의 복수를 구실 삼아 만주의 부족장 아민에게 군사 3만을

주어 조선을 침입하게 하고 아민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쳐들어오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입니다.

 

의주 부윤 이완(이순신 장군의 조카)은 용감히 싸웠지만 적이 너무 강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고 뛰어

들어 목숨을 끊었으며, 후금의 군사는 계속 남으로 쳐내려와 곽산, 정주와 안주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조선의 서북방에 명나라 장수 모문룡 부대가 주둔해 있었는데, 모문룡이 있던 가도도 이미 짓밟혔고,

목숨을 간신히 건진 모문룡은 신미도로 도망쳤습니다.

 

 

후금의 군사들은 평양성을 무너뜨리고 황주까지 진격해와 한성을 눈앞에 두었으며,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을 떠났습니다. 국난을 극복하려는 인조는 이전에 후금에게 항복한 강홍립에게

화해를 청해 보려고 강홍립의 아들을 불렀습니다.

 

강홍립은 후금 진영으로 찾아온 아들을 보자 깜짝 놀랐습니다. 후금에 있을 때 한윤이 찾아와 인조가

자신의 가족을 모조리 죽였다고 거짓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강홍립은 가족이 모두 죽은 줄 알고 후

금의 군사를 따라 복수를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강홍립은 자신의 가족이 살아있자 곧 인조에게 화해를 주선하겠다는 글을 써서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화해를 주장하는 최명길, 이귀 등과 강홍립의 주선으로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었고, 후금의 군사도

물러갔습니다.

 

정묘호란으로 인해 조선 조정은 화해를 주장하는 주화파와 반대하는 척화파로 나누어졌으며, 대신들

모함으로 강홍립은 옥에 갇혔다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