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율곡 이이 십만양병설 시무6조에 기록되어 있어

고두암 2015. 11. 22.

임진왜란을 대비하자는 율곡 이이 십만양병설은 이이 선생이 선조에게 올린 시무6조에 기록된 내용

입니다. 선비들이 동서로 당파가 갈려 싸우자 율곡 이이(1537년~1584년)가 중간에서 화합을 위해

애썼으나 소용 없자, 1575년(선조 8), 선조가 김효원을 삼척 부사로, 심의겸을 전주 부윤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그래도 당파 싸움이 수그러들지 않자 1576년, 이이는 이떻게 손을 써 볼 수가 없어서 벼슬을 내놓고

파주의 율곡으로 내려갔습니다.

 

 

동인과 서인의 싸움은 더욱 심해지고, 세력 또한 이쪽이 커졌다 저쪽이 커졌다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이가 대사간이 되어 두 당을 화해시키려 하였으나 동인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다시 파주로 내려

갔고, 그 뒤 동인들이 중요한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서인들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인들 사이에 또 파가 갈렸습니다. 한성 남산 밑에 사는 우성전을 중심으로 한 파를 '남인'이

라고 불렀고, 북악산 기슭에 사는 이발 중심의 파를 '북인'이라 하였습니다.

 

 

1582년(선조 15), 이이는 다시 선조의 부름으로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 무렵, 함경도 경원 지방의

번호(귀순한 여진인)들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어명을 받은 신립이 그들을 무찌르고 두만강 건너 야인

소굴까지 소탕하였으며, 신립은 이 공으로 함경도 병마 절도사에 올랐습니다.

 

이렇듯 국방이 불안하고 백성의 생활이 어렵거늘, 대신들은 태평성대라고 우겼습니다. 이에 병조판서

이이는 '시무6조'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는데, 여기에는 그 유명한 '십만(10만)양병설'이 씌어 있었는

데, 오랑캐나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10만 명의 병력을 길러 도성에 2만을 두고 각 도에 1만 명을 두자

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유성룡이 나서 반대하는 바람에 유비무환의 국방 정책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나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유성룡은 '성인 이이를 몰라보고 10만 양병설에

반대했다.'며 크게 뉘우쳤다고 합니다.

 

선조의 신임이 날로 두터워지는 이이를 시기한 대신들이 삼사(홍문관, 사간원, 사헌부)를 탄핵하였고,

이이는 벼슬을 내놓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동과 서로 갈리면 인재를 얻기가 어렵다. 어질고 재주있는 사람이라면, 동서를 가리지 말고 뽑아 써야

한다." 이 내용은 율곡 이이가 당파 싸움을 가라앉힐 때 한 말입니다.

그런 이이에게 서인들은 동인 편을 든다고 아우성이었고, 동인들은 그가 서인의 우두머리라고 헐뜯어

진퇴양난에 빠진 것입니다. 벼슬에서 떠난 이이는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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