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최영장군 업적

고두암 2015. 11. 12.

고려 말 최고 명장 최영장군 업적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수차례 수호했다는 것입니다. 최영(1316~1388)은

여러차례 왜구를 토벌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1352년에 안우 등과 함께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군이

되었습니다.

 

1356년에는 공민왕의 영토 수복 정책에 따라 서북면 병마사 인당 등과 함께 압록강 서쪽을 공략하여 원의

세력을 몰아냈고, 1358년에는 전라도 오예포에 침입한 왜선 400척을 격파하는 공을 세우며 고려말 최고의

장수로 우뚝 섰습니다.

 

이듬해에는 서북면 병마사 이방실 등과 함께 서경으로 쳐들어온 4만 명의 홍건족을 물리쳐 명성을 더욱 더

높였고, 1361년에 홍건족이 개경을 다시 침입하자 이방실, 안우 등과 이를 격퇴하고, 1363년에는 김용의

난을 진압했습니다.

 

 

1364년에는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봉하기 위해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자 이성계와 함께 이를 섬멸했습니다. 이후 수시중을 거쳐 1388년에 최고 벼슬인 수문하시중이 되었

으며, 딸을 우왕에게 시집 보내고 왕의 장인이 되어 명실상부한 고려의 최고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바칠 것을 강요하자 최영은 팔도 도통사가 되어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삼고 요동을 정벌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사불가론을 내세워 조민수 등과 손을 잡고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돌아왔고, 최영은 군사

들과 함께 이성계에 맞서 싸우다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현재 경기도 고양에 있는 최영의 무덤은 그의 유언처럼 풀이 나지 않아 적분이라 불렸으나, 후손들이 잔디

를 심어 지금은 푸른 잔디로 덮여 있습니다.

 

위화도 회군이란 이성계가 최영의 요동 정벌 명령을 거역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

며 조민수와 합세하여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의 최영을 친 후 유배를 보내고 자신이 정권을 장악한

을 말합니다.

 

 

이성계의 사불가론이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하고, ②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은 적당하지 않으며, ③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는 동안 왜구가 쳐들어올 염려가 있고, ④ 여름철엔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으며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수 있어 전쟁이 불가하다는 주장입니다.

 

최영장군의 희망대로 그 때 요동을 정벌했더라면 우리나라의 영토가 지금보다는 훨씬 커졌을텐데요, 정말

너무나 아쉽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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