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에 빠져 있던 중국은 수나라 통일이라는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지면서 드넓은 대륙이 마침내 하나의
나라가 되었는데, 바로 서기 589년이었습니다. 수나라가 남조를 멸망시키고 중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
었던 것입니다. 수나라가 통일하기 이전 몇백년 동안 중국은 여러 나라로 갈라져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양쯔 강 북쪽에는 이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북조가 있었고 남쪽에는 한족인 남조가 있었습니다. 이 북조와
남조는 또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어 중국은 오랫 동안 통일이 되지 못하였는데, 이 시기를 남북조시대
라고 하며, 북위가 북제, 북주를 통일하면서 북조라고 하였고, 남조는 송나라, 제나라, 양나라, 진나라로
4왕조가 교체하며 나라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양견이 북위 왕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서 수나라를 세우고 남조를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하면서
수나라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양견(문제)은 장안을 수도로 정하고 율령이라는 법률을 만들어 나라를
다스렸으며, 귀족들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시험을 치러 합격한 사람에게 관직을 주는 과거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던 문제(양견)는 604년에 병이 들어 죽고 그 뒤 둘째 아들인 광이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양제입니다. 양제는 황제가 되기 위해 병이 든 아버지 문제를 죽여 버렸다고도 전해집니다. 양제는
토목 사업을 크게 일으켰는데, 백성들의 생각과 불평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북경에서 화중까지 중국을 남북으로 잇는 약 1,900km나 되는 대운하를 팠으며, 만리장성을 고치고 다시
쌓아 북방 방어진을 다졌습니다. 백성들이 부역에 끌려나와 시달린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공사 중에
사망한 사람들의 시체가 여기 저기에 널려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대운하가 중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대운하의 건설로 화북의 소비 도시와 강남의
곡창 지대를 연결시키는 물길이 열린 것으로, 남부의 물자가 빠르게 북쪽으로 대량 운반되어 남북의 경제
교류가 활발해졌던 것입니다. 또 운하는 농토에 물을 대어 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운하가 완성되자 양제는 호화로운 유람선을 만들어 미인들을 태우고 낙양에서 강도까지 순행길에 올랐습
니다. 수천 척의 배에 후궁, 고급 관리, 외국 사절 등이 탔습니다. 양제가 탄 배는 4층이고 방이 100개가
넘는 규모였다고 합니다. 이 배의 행렬이 200리에 달했다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운하 건설을 마치자 양제는 고구려 원정에 나섰습니다. 수 양제가 612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서 고구려를
원정했다가 국력이 기울고 돌궐족의 반란으로 결국에는 수나라 멸망이라는 새 역사가 생기게 되는데요,
세 차례의 고구려 원정 실패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양제는 113만 대군으로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고, 그 뒤 수나라 해군이 대동강으로 쳐들어갔으나
이번에도 또 실패했습니다. 수나라의 30만 5,000명 대군이 살수(청천강)에서 전멸당한 것이 바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활약했던 '살수대첩'입니다.
양제는 그 뒤에도 613년과 614년에 제2차, 제3차 고구려 침입을 감행하였으나 모두 참패당했습니다.
양제의 잦은 고구려 침입으로 수나라는 경제가 바닥이 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졌으며, 이 틈을 타 돌궐족
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수 양제는 618년 반란을 일으킨 부하들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습니다.
이로서 37년간의 수나라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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