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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민주정치의 발전과정

고두암 2015. 10. 23.

직접 민주 정치를 행한 것으로 유명한 아테네 민주정치의 발전과정은 처음부터 민주정치를 실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폴리스'라는 작은 도시 국가가 200여 개나 있었고, 도시 국가의 인구는

수백 명 또는 수천 명 정도였습니다.

 

폴리스의 중심에는 아크로폴리스라 불리는 높은 언덕이 있었는데, 그 곳에 도시의 수호신을 모신 신전이

우뚝 서 있었으며, 폴리스들은 많은 식민지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세력이 컸던 폴리스가 아테네

와 스파르타였습니다.

 

 

민주주의는 데모크라티아(국민의 지배)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은 그리스어로 '데모스(국민)와

크라티아(지배)'가 합쳐져 생긴 말입니다.

 

직접 민주 정치로 유명한 아테네가 민주 정치를 처음부터 실시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왕정이었으나,

이것이 폐지되고 행정관 9명이 선출되면서 귀족에 의한 정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평민이 참여하는 민회

도 있었으나 중요한 권한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무역과 상공업 발달로 귀족 외에도 부자가 된 평민들이 나타났고,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중장

보병이 생겨서 그들의 발언권이 강해졌습니다. 그러자 지배층인 귀족 세력은 민중의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해 기원전 621년경 아테네 법률을 만들기에 이르렀지만,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참주라는 독재자가 나타나 귀족 정치를 몰아 내고 독재 정권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솔론은 참주의

독재를 막기 위한 개혁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그 뒤,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참주가 나타

나 귀족을 누르고 민중을 위한 정치를 시작하면서, 농민을 지원하고 상공업도 장려하였습니다.

 

 

이러한 참주 정치를 계기로 아테네는 점차 부흥해 갔습니다. 그러나 이 개혁은 곧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

치고 말았고, 결국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자 다시 귀족들이 세력을 잡았습니다.

 

기원전 6세기 말에 이르러 민중이 일대개혁을 실시하며 일어나 민주정치를 세우게 됩니다. 귀족들을

누른 것은 아테네 전역의 데모스(구)로 구성된 10개의 시민단이었습니다. 또 시민들의 총회인 민회가

최종 결정권을 갖고, 이 민회에서 뽑은 대표들로 평의회를 구성하여 정치를 하였습니다.

 

 

이로써 시민이 평등하게 직접 민주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정치가 이루어졌으며, 아테네가 민주주의 전성기

를 맞은 것은 페리클레스 시대입니다. 민회는 '에클레시아'라 하였으며,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 모두가

참석할 수 있었으며, 에클레시아는 행정.입법.사법 등 여러가지 일을 결정하는 최고 기관이 되었습니다.

 

아테네의 관리 임기는 1년이고 재임이 허용되지 않았고, 제비 뽑기 방식의 추첨제라서 시민이면 누구나

관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장군은 국방의 중요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선거를 통해 선출했습니다.

 

언뜻 보면 '모든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매우 평등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민이어야 한다'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테네에서 시민이란 '부모 모두가 아테네인인 성인 남자'를 가르키기 때문입니다. 다른 폴리스 사람이나

여성, 외국인, 노예는 시민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엄격한 제한이 따

랐기 때문에 오늘날의 민주정치와는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테네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전체 인구의 14%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 아테네 시민은

한 사람이 대개 두세 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아테네 시민은 노예 덕으로 정치에 참여해 가며

민주주의를 누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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