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 간략 요약 보기

고두암 2015. 9. 12.

1398년(태조 7)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을 무인정사라고도 하는데, 그 전개과정을

간략하게 요약 정리해 보았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8남 5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6형제는 신의 왕후 한씨가 낳았고, 방번과 방석은 신덕 왕후 강씨가 낳았습니다.

 

신의 왕후는 태조가 젊었을 때 맞은 부인이며, 신덕 왕후는 나중에 얻은 부인이었으나, 신의 왕후가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상을 떠나 신덕 왕후가 정실 왕비가 되었습니다.

 

 

조선 건국 후에 큰 관심사는 누구를 세자로 책봉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신하들은 새나라 건국에 공이 매우

큰 다섯째 왕자 정안 대군(방원)을 밀었으나, 태조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큰아들 방우는 대궐을 떠나 버렸고, 방원은 성격이 과격하여 임금감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신덕 왕후의

간절한 청에 못 이겨 방번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어전 회의 때 태조가 일곱째 왕자 방번(무안 대군)을 세자로

삼고 싶다면서 신하들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배극렴이 말했습니다. "의안 대군(방석)이 더 나은 줄로 이뢰옵니다." 결국 태조는 1392년(태조 1) 

신덕 왕후가 낳은 막내 왕자인 11세의 나이 의안 대군 방석을 세자로 삼았는데, 신의 왕후가 낳은 왕자들이

좋아할리가 없었고, 그 중에서도 조선왕조 창업에 가장 공이 큰 방원의 불만이 매우 컸습니다.

 

이 때부터 조정은 두 세력으로 나뉘었는데, 세자 방석을 받드는 정도전 세력과 방원을 따르는 조준, 김사형

세력이 맞세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덕 왕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크나큰 슬품에 빠졌고,

태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신덕 왕후의 능을 도성 안 황화방(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에 쓰고 수릉군

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습니다.

 

 

어느날 밤, 남은의 집에 정도전, 심호생 등이 모여 방원 세력을 없앨 모의를 하였는데, 그 곳에 '이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무는 방원의 부인인 민씨 쪽으로 친척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슬며시 빠져 나간

이무가 방원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회를 노리던 정안 대군 방원은 이숙번에게 연락하여 황화방의 수릉군을 끌여들였으며,

방원의 사병 등과 함께 방원이 이끄는 군사들이 남은의 집을 덮쳤습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은 달아났다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덕 왕후가 낳은 두 왕자인 무안 대군 방번과 세자 방석도 살해당하고 신덕 왕후 소생인 정순

공주의 남편인 부마 이제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1398년 8월에 일어난 이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 또는

'무인정사'라고 합니다.

 

결국 태조는 어전회의를 열어 둘째 아들 영안 대군 방과를 세자로 삼았습니다. 태조는 두 아들과 사위를

잃어 크게 상심하다가 1398년 9월에 왕위를 세자 방과(정종)에게 물려 주었습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왕자들도 사병을 거느리고 있어, 이것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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