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고려 충신 정몽주

고두암 2015. 8. 28.

고려 말의 문신으로 호는 '포은'이며, 시호는 '문충'인 고려 충신 정몽주(1337~1392)는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 예조정랑, 성균관 박사, 우의사대부 등을 역임했고, 1363년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1380년에는 이성계(조선 태조)와 함께 왜구를 토벌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으며, 오부학당과 향교를

세워 유생들을 가르치고 유학을 진흥하여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1390년부터는 이성계와 정치적으로 결별하여 대립 관계에 놓였으며,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자는 친원 정책에 반대하고 끝까지 고려 왕조를 받들었습니다.

 

1392년 정도전, 조준 등이 혁명을 일으켜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크게 반발하다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인 조영규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정몽주는 훗날 조선의 제3대 임금인 태종이 되는 이방원과 주고 받은 시조로 유명한데요, 그 시조는

'하여가'와 '단심가'로 다음과 같습니다.

 

<하여가>

'하여가'는 훗날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젊은 시절 고려의 충신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위해 지은 시로 '청구영언'에 그 원시가 전해오며, '포은집'에는 한역시가 전해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서로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

'단심가'는 이방원의 '하여가'대한 답시로 고려 왕실을 향한 정몽주의 변치않는 마음이 잘 담겨진

시로, 이 시는 '포은집'과 '해동악부, 청구영언'등에 실려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의 내용만 보더라도 정몽주는 진정한 고려의 충신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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