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안중근의사 서거일 및 사형선고일

고두암 2017. 2. 16.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사 서거일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이며,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은 1910년 2월 14일입니다. 1910년 3월 26일 순국한 안중근 의사께서는

"2,000만 우리 형제자매가 분발해서 학무에 힘쓰고 산업을 진흥하여 자주독립을 회복

하기 바랍니다." 라고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공고롭게도 우리가 초콜렛을 주고 받는 발렌타인데이가 안중근 의사께서 사형선고를

받은 날입니다. 민족의 영웅이신 안중근 의사를 생각한다면 이날은 엄숙해야 하지

 

않을까요? 일본이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을 숨기려고 얄팍한 상술로 초콜렛을 주고

받는 날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한번쯤 생각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민족의 치욕이자 역사적인 치욕입니다. 당연히 발렌타인데이

인지 나발인지를 없애야 하겠지요. 우리 민족이 외국의 문화에 길들여져 민족의 영웅

이 사형선고를 받은 날도 잊고 희희낙락한다면 한심한 민족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안중근 의사 어머니이신 조마리아 여사께서는 일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에게 아래와 같이 편지를 보내 영웅의 죽음을 민족을 위해 담담하게 받아들이

셨습니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한다

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은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타~앙!

안중근이 쏜 총알이 이토히로부미의 가슴에 맞았습니다. 다시 총소리가 두 세번 요란

하게 울리고, "대한독립 만세!" 하고 안중근의 외침이 터져 나왔고, 조선 침략의 원수

이토히로부미가 거꾸러졌으며,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와 궁내 대신 모리, 만주 철도

회사 이사 다나카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토히로부미가 안중근이 쏜 총알에 맞아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퍼졌습

니다. 이 의거는 나라 안팎의 독립 지사들에게 사기를 복돋아 주었습니다. 안중근은

순순히 체포되어 러시아 헌병대에서 이틀을 보냈으며, 일본 헌병대에 넘겨져 고문

을 받았습니다.

 

우덕순과 조도선도 체포되었습니다. 그 뒤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는데, 안중근은

대한 남아의 의기를 잃지 않고 웅변으로 답했습니다. "나는 대한 의군 참모 중장

으로서 적장 이토를 죽였다!" 일본 재판장이 왜 이토히로부미를 죽였느냐고 묻자

안중근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이토의 악랄한 정책을 세계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우덕순은 3년, 조도선.유동하는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안중근은 뤼순(여순) 감옥에서 여섯 달 동안

갇혀 있으면서 <동양평화론>이라는 논문도 썼는데, 다 쓰지 못하여 사형을 연기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동양평화론>은 끝내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순국한 안중근 의사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동포에게 남겼습니다.

 

"2,000만 우리 형제 자매가 분발해서 학무에 힘쓰고 산업을 진흥하여 자주 독립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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