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만적의 난과 묘청의 난이란

고두암 2015. 2. 24.

고려 중기 무신정권을 차지하고 있던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이 일으킨 난을 만적의

난이라고 하며 고려 인종 때 승려 묘청이 일으킨 난이 묘청의 난이라 한다.

 

만적의 난은 1198년(고려 신종 1)에 일어났으며 묘청의 난은 1135년(고려 인종 13)에

일어났다. 두 난의 공통점은 고려시대의 난이었다는 것이다.

 

 

만적의 난을 일으킨 만적은 "왕후 장상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을까? 때가 오면 

누구든지 가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말고 함께 반란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

되어 미수에 그쳤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노에해방운동이라는 의의를 가진다.

 

 

풍수지리설로도 유명한 고려 승려 묘청이 일으킨 묘청의 난은 풍수지리의 이상을

표방하고 지금의 평양인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개경세력인 김부식의

반대로 실패하자 난을 일으키게 되었다.

 

관군의 공격으로 진압된 묘청의 난을 신채호 선생은 '조선 천년 역사에서 최고의

사건'이라고 말하며 자주성의 측면에서 높이 평가했다.

 

묘청은 고려 인종 때의 혁신적인 승려로서 고려 귀족 불교의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허구성을 극복하고자 우리나라 고유의 신앙과 풍수지리설을 블교에 도입하여 민중

적인 신앙불교를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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