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 원인

고두암 2016. 2. 1.

1895년 음력 8월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을미사변'이라고 하는데, 을미사변 원인은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차단하고 조선의 내정을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위함이었으며,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은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싸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럼 명성황후는 어떤 인물인지, 을미사변 과정은 어떠했는지, 이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민씨 일파 세도 정치를 이끈 명성황후>

 명성황후(1851~1895)의 이름은 민자영으로 본관은 여흥이며 인현왕후 아버지인 민유증의 후손입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인현왕후의 사가였던 감고당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로 인한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열악한 민자영의 집안환경이

외척의 세도 정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녀를 왕비로 간택했지만, 이것은 흥선대원군이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결국에는 민씨 일파가 세도 정치를 하였으니까요.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는 달리 개방 정책을 써서 조선을 이끌려 했지만, 이미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

으로 개항 시기를 놓쳐 버린 조선은 불리한 여건에서 개항할 수 밖에 없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정치는 국가 전체를 생각하기보다는 조선 왕실과 자신의 가문에만  머물렀기에, 친족

인 민씨 일파가 세도 정치를 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민씨 일파의 부패는 격변하는 국제 정세에 조선이 

스스로 대처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힘없이 끌려다니는 상황을 불러왔습니다.

 

결국 러시아와 가까이 지내던 명성황후는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눈에는 가시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일본은 급기야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이라는 잔인한 사건을 일으켜 조선의 국모임에도 불구하고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시해사건 을미사변>

명성황후와 조선 정부는 일본군을 조선에서 내몰려고 러시아와 가까워지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일본은 급기야 명성황후 시해라는 극단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치밀하게 준비되었습니다.

 

제물포항에 도착한 일본의 낭인들은 조선 내 협력자들의 안내로 불과 3시간 만에 경복궁으로 난입하여

궁인들을 마구잡이로 도륙하고 마침내 명성황후마저 시해하여,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1895년 음력 8월 20일에 일어난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하며, 이후 분노한 조선의 백성들은 국모의

복수를 다짐하며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한편,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1896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했으며, 친러 정권을

세웠습니다. 이것을 '아관파천'이라 합니다. 이로 인해 나라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국권 침해는 더욱 더

심해졌습니다.

 

조선의 국모를 살해하고 조선을 멸한 일본의 행위는 당시에도 국가적인 지탄을 받았고, 오늘날에도 비난

받아야 할 마땅한 잔인한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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