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인조 삼배 인조의 굴욕 삼전도의 굴욕 상식

고두암 2023. 9. 9.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굴욕의 왕입니다. 인조 삼배로 인한 삼전도의 굴욕이자 인조의 굴욕은 비단 인조 개인에게만 국한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실리외교에 어둡고 당리당략에 눈이 멀어 당파 싸움만 일삼던 조정 대신들에게도 씻지 못할 치욕을 앉겨주었고, 한심한 왕과 신하들로 인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만 불행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굴욕의 왕 인조(재위 1623~1649)가 병자호란 때 경기도 광주군의 한강 변두리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한 후,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충성을 맹세하는 치욕을 겪었는데요, 인조 삼배는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자 인조의 굴욕인 것입니다. 

 

 

조선이 임진왜란의 후유증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무렵인 1616년, 만주에서는 누루하치가 금나라를 잇는 후금을 건국하며 명나라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신라인 김함보(김행)의 후손이었던 누루하치는 조선을 '아버지의 나라'라고 부르며 우호적으로 대하였고, 또 광해군의 중립정책으로 별다른 마찰을 빚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623년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중립정책을 펴던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친명파 인조가 등극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1624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 이괄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쳐 인조반정과 광해군의 폐위 사실을 알리며 후금을 자극하였고, 설상가상으로, 1627년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등극하며 조선을 대하던 후금의 태도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후금의 2대 칸(왕) 홍타이지는 명나라를 치기 전에 자신들의 배후를 위협하고 있는 조선을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결국 1627년 1월 14일, 홍타이지는 광해군의 복수를 구실삼아 만주의 부족장 아민에게 군사 3만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입니다. 

 

 

이후 후금은 끊임없이 무리한 요구를 해 오며 조정을 압박했고, 이에 조선이 응하지 않자 1636년 12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략해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후금이 다시 쳐들어오자 인조는 세자와 왕자를 비롯한 왕족들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피했으나, 45일 만에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끓고 3번 절하고 아홉번 이마를 찧으며 충성을 맹세하는 치욕을 겪은 것입니다.

 

 

조선의 항복을 받은 청 태종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의 왕족들을 볼모로 끌고 갔으며,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을 끌고 가서 처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선 여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가 치욕적인 삶을 살아야 했으며, 청나라 군사들의 노략질로 가옥이 불타고 농토는 황폐해졌으니 백성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미 국력이 다해 가울어가는 명나라와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의 정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천명배금(명나라 중시, 청나라 멸시)이라는 명분만 앞세워 청나라를 자극했으며, 이괄 같은 명장을 모함하여 국경을 비워 둔 인조와 조정 대신들의 무능함이 병자호란이라는 참극을 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 홍경모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왕의 옛 성이라고 주장했는데요, 병자호란 직후인 1639년, 인조는 남한산성에 온조왕의 사당을 건립했고 김상헌을 온조의 사당에 보내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남한산성이 백제의 옛도읍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인조는 온조왕의 힘을 빌려서라도 국난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조선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내지 못하고 청나라에 항복해야 했던 치욕의 장소로 남았습니다.

 

이상으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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