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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이항쟁은 인도 최대의 민족 항쟁

고두암 2015. 7. 31.

1857년 인도가 영국에 대항하면서 발생한 항쟁이 세포이항쟁인데, 이는 인도 최대의 민족 항쟁

이며, 세포이항쟁의 원인은 영국이 인도인을 차별하며, 크리스트교의 개종을 강요하였기 때문

이며, 동인도회사의 인도인 용병(세포이)들이 봉기해 델리(인도 북부의 상업도시)를 점령하면서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세포이항쟁이 일어나자 1859년 7월 영국군이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강력한 지도조직

이 없고 지속적인 항쟁이 부족하여 항쟁은 패하였으며, 항쟁의 결과, 1858년 인도통치개선법이

제정되었고, 동인도회사가 해체되는 등 영국의 인도 통치 방식이 변화하였습니다.

 

또 인도 무굴제곡의 황제가 폐위되고, 1877년 영국 여왕을 수장으로 하는 인도제국이 수립되었

습니다.

 

세포이항쟁의 의의는 무엇일까요? 세포이항쟁의 의의는 인도 최초의 민족적 항쟁으로 독립전쟁

양상을 뛰었으며, 인종, 종교, 카스트(인도의 신분제도)의 구별없이 광범위한 계층이 연합한

최초의 '반영 항쟁'이라는 것입니다.

 

동인도회사란 17세기 유럽 각국이 인도 및 동남아시아와 무역하기 위하여 동인도에 세운 무역

독점 회사입니다.

 

 

그럼 세포이항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 시대의 역사를 살펴볼까요?

 

세포이항쟁 1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757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와의 플라시 싸움

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영국은 뱅골의 정세권을 얻어 세금을 물림으로써 인도 지배의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이 때 영국은 인도 용병 세포이를 처음으로 채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했지요.

 

이 무렵 인도를 다스리던 무굴제국은 힘이 없어서 영국이 인도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었고,

인도의 지방 지배자들을 무릎끓도록 하여, 인도 각지를 차례대로 점령하였으며, 무굴 황제만을

형식적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1849년 영국은 시크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놓고, 1856년에는 아우드 태수의 영토마저 영국에

합병해 버렸는데, 아우드는 영국을 가장 우호적으로 대하였기에, 특히 많은 세포이가 이 곳

에서 나왔으며, 세포이들은 아우드 영토가 영국에 합병되자 분노하면서 치를 떨게 되었습니다.

 

 

또 영국은 세포이들에게 해외 파병을 요구하였고, 세포이는 그것이 힌두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거부하였습니다. 영국군을 돕는 해외 파병은 그들의 종교에 위배되는 것이었지요.

 

그러자 1856년 영국은 세포이들에게 일방적으로 "해외근무를 할 수 있는 자만 채용한다."라고

선포하였고, 1857년 5월 10일 마침내 크게 분노한 세포이들이 영국 장교들을 죽이고, 델리로

진군하면서 항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세포이들은 무굴제국의 황제 바하둘샤 2세를 받아들이면서, 대항쟁이 되었으며, 무굴제국과

영국제국의 싸움으로 번졌고, 지주층과 중소 농민층이 참여함으로써, 민족적 항쟁으로 확대

되어, 1857년부터 2년 동안 전개되었습니다.

 

1859년 7월, 영국군은 세포이 항쟁군을 완전히 평정하였고, 이를 계기로 인도에 세워졌던,

동인도 회사가 폐지되고 영국 정부가 인도를 직접 통치하였습니다.

 

비록 세포이항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것은 인도인 모두에게 민족성을 일깨워 주어, '반영

독립 운동'의 첫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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